본관이 같은 성씨의 첫 조상(시조)으로부터 현대를 사는 사람까지의 내력을 계통적으로 적은 책이다. 한 종족의 역사이며 생활사인 동시에 혈통, 즉 조상의 뿌리를 증명하는 귀중한 문헌보감이다. 우리 선조들은 전쟁이나 화재같은 변란때에도 족보는 소중하게 보존하였고, 평상시에도 가보처럼여겨왔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등 가계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 해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나라 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 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의 문장가인 소순, 소식, 소철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이 처음이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성명과 생년월일 만을 기록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관향, 본, 관이라고도 하는데 貫이란 돈 꾸러미로 친족의 혈연성을 뜻하는 말이다.(貫錢見之貫 本貫鄕籍也)
첫 조상이나 증시조의 출신지, 정착 세거지명을 근거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봉군(공로 훈장 같은 이름)
칭호나 시호(사후의 칭호), 아호에서 이름이 붙어질 수 있다.
나를 포함한 개념으로 선조(1세)로부터 따져 내려가는 용어
아버지를 1대로 자기를 뺀 나머지를 차례로 따지는 용어
예컨테 부자 사이가 세로는 2세이지만 대는 1대이다.
그러므로 시조로부터 14세손이 되는 사람은 시조가 13대조이며, 시조에게는 13대손에 해당한다.
5대조 = 玄組, 4대조 = 고조, 3대조 = 증조, 2대조 = 조부, 1대 = 부, 0대 = 자신
5대손 = 來孫, 4대손 = 玄孫, 3대손 = 증손, 2대손 = 손, 1대손 = 자, 0대 = 자신
한국 옛 풍습에는 어렸을 때 아명(兒名), 성년식(관례) 후 관명(冠名=字), 족보에 수록하는 항명(行名),
그밖의 별호(別號=號)로 엄격히 구분되어져 있었으나 현대사회는 호적에 출생신고 성명하나로 통일되었다.
시조(비조), 중시조, 선계(시조 이전 조상), 항렬, 생졸, 베필, 묘소, 묘비(비명), 신도비(종2품 이상),
묘갈(정3품 이하), 묘표(墓表 = 표석), 음기(陰記 = 비석 뒷면 사적 기록문장),
묘지(墓誌, 지석 - 죽은 이의 사적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운 돌)
김씨 120본, 이씨 116본, 박씨 51본, 최씨 43본으로 기록되어 전하지만, 1930년대 조사에 따르면 김씨 85본, 이씨 103본, 박씨 34본, 최씨 34본 등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내우외환으로 인한 종족 감소로 분석되고 있다.
또 1990년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총 성씨수는 287개 성이고, 본관별 성씨수는 3,440개라고 한다.